2022년 04 월 15일

“교수님, 출석은 점수에 얼마나 반영이 되나요?”
“ㅇㅇㅇ 과목 오늘 출석 체크 했나요?”

이런 지겨운 질문은 대학교에서 이제 사라졌으면 한다. 대학생 쯤 되는 사람의 학업 성취도를 평가하는데, 그 자리에 몇 번 앉아있었는지 여부를 세어야 할 정도로 우리 사회의 수준이 낮은가?

나는 강의에서 출석 체크를 하지 않는다. 출석부에 적힌 이름을 가끔 부르는 이유는 학생들의 얼굴과 이름을 외우기 위함일 뿐, 횟수를 세어 학점에 반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수업에 100% 출석하는 것은 기본이기 때문이다. 수강 신청을 했다는 것은 해당 수업을 충실히 다 들을 것에 대한 약속이다. 그런데 출석 점수를 정량화 하는 것은, 수업을 몇 번까지는 빠져도 되는 것 쯤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이렇게 말하면, 분명 누군가 반문할 것이다. “그러면 불가피한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하나요?” 그러면 못오는 것이지 뭐 별수 있나? 불가피한 상황인지 아닌지는 본인이 판단하는 것이고, 교수는 판단할 수도, 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살면서 기본적으로 지켜야할 많은 것들을 유치원 때 배웠지만, 이를 못 지킬만한 불가피한 상황에 종종 빠지지 않는가? 약속을 지키는 것은 지성인의 기본이다. 허나 몇 번을 못 지켰을때 내가 비로소 지성인에서 비지성인이 되는가? 그런 기준이 있는가? 오히려 그런 기준이 있는 것이 더 신뢰라는 가치를 훼손하지 않을까? 벌점 스티커에 일희일비하는 유치원생은 이제 아니지 않는가? 이런 이유로 출석 점수도 정량화 하지 않는다. 정량화 할만큼 가치가 낮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대학생들은 성인이고, 본인이 결정한 여러 이유로 수업에 오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이를 존중한다. 내 강의 수준이 낮아 도저히 들어줄 수 없어서 오지 않는 학생이 있다면, 어떻게 감히 내가 출석 점수를 매길 수 있겠는가? 이런 경우 태도와 행동이 바뀌어야 하는 것은 교수이지 학생이 아니다. 강의 평가에 써달라. 내가 고치겠다. 또한, 어떤 학생에게는 해당 시간을 수업보다 훨씬 중요한데 써야할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시간에 내 강의보다 더 중요하고 학생의 인생을 바꿀만한 무언가가 있다면? 일생일대의 대박 창업을 위한 구상, 천생연분, 다시는 오지 않을 캠퍼스의 낭만이 내 강의보다 덜 중요하다고 할 자신이 나는 없다.

셋째, 작은 것부터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 연습 기회를 제공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초중고를 거치며 작은 것이라도 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머리 모양, 옷 (교복), 시간표, 실내화 유형 등. 신체에 관한 규정은 나아졌는지 모르겠지만, 전반적인 환경은 지금도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학생들에게 대학교에서까지 사사건건 간섭을 하면, 자기의 일에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는 연습은 어디서 할 수 있는가? 대학은 우리 인생에서 마지막 샌드박스이다. 잠깐 실수해도, 나태해져도, 학생이니까 이해가 되고, 학교가 다시 보듬어주고 기회를 줄 수 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면 이제는 정말 살벌한 실전이다. 대학이 이런 학생들에게 충분한 연습 경기를 제공해야한다. 출석 횟수를 세어서 억지로 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해서 본인에게 맞는 선택을 스스로 하게끔 기회를 주어야 한다.

넷째, 교육에서 보상이란 얻는 대상이 되어야지 깎이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살벌한 독재, 군대 문화, 입시 경쟁이 만연해서인가? 내 짧은 경험에 비추어보면 우리 사회는 얻는 것 보다 잃지 않는 것에 더 중히 여기는 것 같다. 입시를 거치며 늘 입에 붙은 말은 점수를 얼마 땄느냐 (몇 개 맞았냐)가 아니라, 얼마 깎였냐 (몇 개 틀렸냐) 였다.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하는 것을 칭찬하는 것보다는,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는 문화가 여전히 만연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 같은 말이 진리처럼 보이게 하고, 누가 잘했느냐가 아니라 누가 못하지 않았느냐로 평가하는 시스템을 만연하게 만든다. 아직도 은연중에 모두가 몸 사리고, 틀을 깨는 창의적인 생각을 못하게 가로막는다. 나는 못하는 사람을 솎아서 벌을 주는 방식이 아니라, 잘하는 사람을 골라 상을 주는 시스템이 건전하고 건설적인 시스템이라 믿는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 아니라 원점일 뿐이고, 시키는 대로 하여 감점을 피하는게 최선이 아니라, 스스로 열심히 할 수록 더 많은 보상이 주어지는 시스템이라야 구성원을 성장시킨다고 굳게 믿는다. 이를 일개 교수가 수업에서 온전히 실현하기엔 부족함이 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주고 싶어서 출석을 안하면 깎는 출석 점수 대신,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학생에게 격려하기 위해 부여하는 참여 점수를 두고 있다.

마지막으로, 성실함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지금도 출석부 바깥 보이지 않는 곳에서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 그 매 시간 맨 앞줄에서 열심히 질문하던 그 ㅇㅇㅇ? 걔 정도면 믿을만 하지.”, “아, 맨날 안보이다가 시험 기간에 강의노트 빌려달라는 우리 동기 ㅇㅇㅇ? 걔 하는 걸로 봐서는 좀 힘들 것 같은데…”. 무의식중에 교수들, 선후배들, 친구들의 머릿속에 각인되는 점수는 출석 점수 몇 점보다 더 가치있고 살벌하다. 또한 그 평가는 학기가 지나도 초기화되지 아니한다. 지금도, 내년에도, 10 년후에도 꾸준히 어딘가에서 일어날 것이다. 이렇게 고도화된 평가가 이미 있는 마당에, 단순 출현 횟수 세기는 무의미하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학생들에게 전혀 출석을 강요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학생들이 수업에 많이 오기를 바란다. 코로나로 어느덧 익숙해져버린 줌을 탈출하고 왁자지껄한 캠퍼스, 강의실로 오길 바란다. 줌과는 달리 캠퍼스에는 내 졸강만 있는 것이 아니다. 캠퍼스에는 강의보다 즐거운 공강 시간이 있지 않은가? 교수보다 뛰어난 설명을 해주는 친구들도 있지 않는가? 정말 중요한 일은 늘 예상치 못한데서 벌어지지 않던가? “아.. 아까 그 수업 내용 뭔말인지 영 모르겠던데”, “아 그거? 별거 아니고 ㅇㅇㅇ 라는 것 같더라”, “아까 그 ㅇㅇㅇ 에 대해서 나는 그 교수님 생각이랑 다른데… ㅇㅇㅇ 이란게 실현 가능할 것 같더라고 (이러쿵저러쿵)”.